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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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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나에겐 날개가 있으니 하늘을 날 수 있어

  • 작성일2017-07-14 14:06
  • 조회수936
  • 수상자조O진

<나에겐 날개가 있으니 하늘을 날 수 있어>

나에겐 날개가 있으니 하늘을 날 수 있어
-언타이틀 [날개 가사 中] -

어두웠던 어린 시절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나는 공부를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이후의 시절은 암흑처럼 지냈다.

점수에 맞춰 연세대 행정학과에 입학했고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선택으로 인해 한 학기 만에 대학생활에 환멸을 느꼈다. 자퇴를 고려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휴학을 했고 그해 여름방학 우울증 약을 먹었고 자살시도를 했다.

신앙의 힘으로 단약을 했고 졸업할 때 사회복지자격증과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두 손에 거머쥔 모습을 그리며 3학년 2학기 늦은 시기에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내가 그린 모습 그대로 나는 졸업을 했다.

직장생활

어렵게 들어간 첫 직장에서 나는 영어번역을 주업무로 해야 했다.

두 번이나 사표를 냈지만 상사는 “젊은이가 그렇게 패기가 없어서 되겠냐.”며 만류했다.

2년 3개월을 버텨냈지만 여러 가지 스트레스 요인으로 인해 사표를 내고 말았다.

신앙의 힘도 빛을 잃고 나는 방황을 했고 집에만 있게 되었다.

급격히 어두워진 나는 밖에 나갈 힘도 씻을 힘도 잃었다.

의사는 내게 정신불열 음성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죽은 듯이 지낸 5년의 세월을 거치고 나자 어느덧 나는 30살이 되었다.

꽃 같은 20대를 허망하게 보낸 나는 심기일전하여 노인장애인복지관에 취업하였다. 하지만 3개월 인턴과정을 거치고 난 뒤 사회경험 부족 등의 이유로 정식으로 임용되지 못했다.

재취업한 장애인복지기관에서 신앙을 회복했고 예전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나는 병이 다 다 나았다고 생각했고 단약을 했다.

설 연휴 동안 홀로 기도원에 올라간 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상스레 영어도 잘 써지는 것 같았고 피아노도 예전보다 훨씬 잘 쳐진다고 느낀 나는 영어와 피아노 은사를 얻었다고 믿었다.

적응을 잘 해온 직장에 사표를 던졌고 하느님께 헌신하겠다고 설쳐댔다.

정신병원과 나

그 모습을 과하다고 여긴 아버지와 함께 정신과를 다시 찾게 되었다. 의사는 나에게 과도한 종교망상이 있는 조증상태라고 판단했다.

조울증이라는 진단명을 가지고 나는 폐쇄병동에 3개월 동안 입원하게 되었다.

증상이 심한 환자들의 고성과 답답한 폐쇄병동의 생활 그리고 강하게 처방된 약물로 인해 쉼을 얻기보다는 고문을 당하는 듯한 괴로움을 겪었다.

처음에는 병식이 없어 약을 먹지 않겠다고 버텼고 그 때마다 나는 강박실에서 사지를 묶인 채 강박을 당해야했다. 약 대신 더 강한 주사를 맞고 잠들면서 나는 참으로 묻고 싶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온 병원에서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하는가?”

정신병원에서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들은 나를 더욱 위축시켰고 우울감에 더욱 사로잡혔다. 스스로를 패배자라 여겼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스로 입원을 하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되레 편안함을 느꼈다.

배움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다

나는 정신장애3급이 되었고 용기를 내어 공부한 간호조무사과정과 요양보호사과정에서 정신과 약을 먹는 다는 이유로 자격증을 따지 못했다. 취업하는 것을 보류하고 나는 내일배움카드를 이용해 관심이 있었던 난초 강사, 어린이 영어강사 , 역사·문화·생태 체험학습강사, 어린이 요가 강사 양성과정을 이수했다.

다시 취업하다

배움을 통해 사회로 나갈 힘을 조금 얻은 나는 장애인 일자리를 통해 주민센터에서 근무했다.

주민센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직업기관인 지하철택배회사에 취업했다.

머리보다는 몸을 많이 움직이는 노동은 복잡한 생각을 단순케 했으며 체력을 많이 길러주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항상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주는 남자친구를 만난 것이다.

남자친구와의 달콤한 연애와 택배 일에 만족하고 있을 무렵 함께 택배일을 하던 당사자 언니가 말했다.

“택배 일에 안주할 수 없어. 택배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으니 나는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갈 거야.”

그리고 언니는 말처럼 언니가 잘하는 분야에 취업해 생활의 안정을 얻었다.

이에 크게 도전을 받은 나는 택배 일을 그만 두고 복지일자리사업을 통해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란 곳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될 무렵 나는 한통의 반가운 전화를 받게 된다.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전)대표 김락우 선생님의 전화였다.

“유진선생님! 저의 자립생활센터가 서울시 지원금을 받게 되었어요. 함께 일해주시겠어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한정자)는 당사자의 힘으로 한국에서 처음 설립된 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다.

이곳에서는 사회복지사 자격을 갖춘 비당사자가 있지만 지도·감독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당사자와 동등한 활동가로서 함께 할 뿐이다.

한정자에서는 달랐다.

장애인일자리에서는 왠지 내가 비당사자들 사이에서 섞일 수 없는 섬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주어지는 업무도 단순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한정자에서는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은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서적 동질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고 비당사자들도 스스럼없이 우리와 함께 어울렸기에 나는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한정자는 내게 사회복지사로서 내가 갖고 있던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동료상담, 행정업무, 행사지원, 성과보고회 사회까지 다양한 영역을 경험하면서 나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한정자에서 활동가로 일하면서 나는 내가 겪은 경험에 감사하게 되었다. 나의 경험을 통해 동료를 이해하고 먼저 사회에 진출한 선배로서 동료들을 지역사회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료들로부터 나도 새로운 힘을 얻고 지지를 받았다.

한정자는 정신장애당사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기자회견과 일인시위를 감행하고 언론모니터링, 기자단 활동을 했고 토론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정신보건법, 정책 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조직화된 힘에 동참하게 된 것, 사회를 바라보든 다양한 관점을 얻게 된 것도 나에겐 큰 열매라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는 둥지에서 따스하게 때로는 치열하게 성숙했다.

그리고 이제 날개를 펴고 세상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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